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세계 대전 (문단 편집) === 반전 의식의 강화와 민주적 전쟁 억제 === [[총력전]]을 겪고 난 사람들은 더 이상 전쟁이 군인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모두 겪는 것[* 전쟁 중에 발생한 잔혹하고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이 전쟁에 대한 인식 변화의 주 원인이었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전체주의]]와 [[제국주의]]는 과거의 위상을 잃고 몰락했다.[* 특히 피식민지 국가 출신들이었던 나라들 사이에선 외세를 배척하고 민족의 단결을 외치는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아프리카나 아시아 일부 국가들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다만 이중 일부는 이를 이용해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악용하는 일도 생겨났고 특히 외세의 영향을 받는다는 이유로 원조나 공업화 및 산업화 역시 거부하는 풍조도 생겨났다. 이는 한편으로는 국가발전을 더디게 하거나 정체시키는 원인을 제공하는 부작용이 되기도 했다.] 또한 [[세계 대전]]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인식을 전 세계인들에게 각인했다. 2차 대전은 히로시마-나가사키로 대표되는 신무기 실험장의 각축전이었으며 이것들은 민간인이라고 전혀 피해가지 않았다[* 이는 일본의 소위 천황의 안위를 보위한다는 미명하에 행해진 '[[카미카제]]' 및 '1억 총옥쇄'와 같은 인명경시 풍조로 인해 미국으로 하여금 신속한 종전을 위해 내려진 원인이기도 했다. 나치 독일 역시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의 무지와 아집으로 인해 수도 베를린이 폭격당하기도 했고 결국에는 [[베를린 공방전]]으로 인해 수도가 함락되고 민간인이 희생됨은 물론, 국토가 분단되었던 비극을 겪었다. 게다가 일본은 종전을 선언했던 그 순간까지 [[궁성사건|이런]] [[마츠에 소요 사건|발악]]을 벌이는 등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현대무기를 동원한 초토화작전이나 핵폭탄의 공포까지 목격한 국민들과 각국 정부는 이제는 확실하게 이긴다 해도 대충 배상금으로 뭉개버릴 수 없을 만큼 전쟁은 치를 대가가 큰 아주 비싼 수단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전근대에서 제국주의 시대까지 수백 년 동안 독일뿐 아니라 유럽 모든 국가들이 전쟁을 좀 과격한 목적 투사 수단 정도로 봤다. 따라서 전쟁으로 인해 출혈이 좀 있어도 얻은 영토나 패전국에 배상금을 지워서 해결하려는 마인드가 있었다. 전쟁의 무게감이 본격적으로 묵직해지기 시작한 건 몇백만 단위로 죽어나간 1차 대전부터이다. 특히나 2차대전까지 가자 민간인들까지 천만 단위로 죽고, 아예 눈 앞에서 도시가 삭제당하는 원폭의 위력을 본 각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전쟁은 근대 이전 시기보다 훨씬 참혹하고 무거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전 국토가 휩쓸렸기에 배후 중상설 같은 음모는 자라날 틈조차도 없었다.][* 여기에 식민지배로 신음하던 피지배국 백성들이 단지 지배국 국가의 '국민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과 연관이 없는 전쟁에 '징집'되어 끌려가야 했던 비극을 당해야 했다. 게다가 이렇게 참전해서 전사를 당했음에도 이들에게 내려진 결과는 철저한 버림받음과 무시였고 종전 이후에도 그 어떤 보상 조차 받을 수 없었다. 단지 자기 나라 본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으로 인한 대립 구도가 전면전으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했다.[* 이 경향은 [[6.25 전쟁]]에도 확연히 나타나는 데, 당시 북한이 소련제 무기로 무장하면서 소련이 지원한다는 사실이 명확함에도 미국, 소련 둘다 서로 모르는 척했다. 그만큼 서로 전면전으로 가는 것을 꺼렸다.] 물론 강대국들 간의 무력대결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고, 약소국 사이의 대리전으로 대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